맨체스터 시티 FC
1. 개요
영국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소속 프로 축구 클럽. 연고지는 맨체스터. 홈 구장은 에티하드 스타디움.
맨체스터의 이름을 가진 축구 팀은 그레이터맨체스터 주 안에 무수히 있지만 개중 그레이터맨체스터 주의 중심도시인 '''맨체스터 시'''를 연고로 하는 '''유일한''' 1부 리그 팀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는 그레이터 맨체스터 주의 트래포드(Trafford)가 연고지이고 볼턴 원더러스 FC, 위건 애슬레틱 FC는 그레이터 맨체스터 주의 볼턴과 위건에 속해있다. 자세한 사항은 맨체스터 항목 참조.
1880년 세인트 마크스라는 이름으로 창단하여 1887년 아드윅 AFC로 바꿨다가 1894년에 맨체스터 시티로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
구단주는 아랍 에미리트의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이다. 법적으로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아부다비 유나이티드 그룹(ADUG)이 시티 풋볼 그룹의 대주주가 되고 시티 풋볼 그룹과 그 회장인 칼둔 알 무바라크가 그를 대신하여 구단을 지배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나, 만수르가 투자청을 세운 이유는 맨시티를 인수하기 위해서이고 그 예하의 시티 풋볼 그룹은 맨시티 인수 이후 전 세계의 다른 구단들(뉴욕 시티 FC, 멜버른 시티 FC 등)과 함께 지배하기 위해서 생겨난 경영 구조일 뿐이므로 최종 결재권자는 여전히 만수르이다.
2. 엠블럼
방패를 포함해서 역대 엠블럼에 공통적으로 (또는 몇 군데에서만) 들어가는 상징들은 모두 본래 맨체스터 시의 상징들에서 따온 것이다. 각각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방패'''는 맨체스터라는 도시의 발생 계기가 고대 로마 시절 요새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도시가 지형적으로 방어 능력이 뛰어났던 것'''을 의미한다.
방패 안에서 윗부분에 있는 것은 '''배(船)'''로 맨체스터가 '''교역도시'''임을 상징하며 배 아래에 물결치는 것은 맨체스터에 있는 '''운하'''를 의미한다. 지역 라이벌 클럽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물 위에 떠다니는 배를 찾을 수 있다.
그 아래의 세 개의 직선은 맨체스터의 '''세 개의 강'''을 뜻하는 것으로 각각 어웰 (Irwell), 어크 (Irk), 메들록 (Medlock) 강이라고 한다.
그리고 '''장미'''는 맨체스터가 지금은 분리되어있지만 본래 랭커셔 주의 일부였기 때문에 '''랭커셔 주와 랭커스터 가문'''의 상징인 장미가 들어간 것이다.
2.1. 검독수리
1997년부터 2016년까지 쓰인 엠블럼이다.1997 City unveil a new club badge. This new design features the Latin motto “Superbia in proelio” meaning ‘Pride in battle’.
1997년 시티가 새로운 클럽 뱃지를 발표한다. 이 새로운 디자인은 '전장에서의 자긍심' (Pride in battle)이라는 뜻의 라틴어 모토 “Superbia in proelio”가 특징이다.
중앙의 독수리는 검독수리 (Golden Eagle)이며 아래에 적혀있는 문구는 Pride in Battle (전장에서의 자긍심)을 뜻하는 라틴어 표어인 '''Superbia in proelio'''이다. 엠블럼에는 필기체로 적혀있기 때문에 o가 a와 헷갈려 proelio, proelia, praelio, praelia 등(...) 논쟁이 있었지만 분명히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proelio가 맞다.
독수리 위에 있는 세 개의 별은 세리에 A의 유벤투스나 인테르처럼 리그 우승 횟수 같은 걸 상징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장식이다.'''
사실 이 엠블럼의 문양은 화려해보이지만 이것이 만들어진 역사는 참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엠블럼이 만들어진 해가 1997년인데 맨시티는 해당시즌인 1997-98 시즌 챔피언십 18위를 차지하며, 팀 역사상 최초로 3부 리그로 강등당하기 때문이다. 강등당하기 바로 직전인 당시 1997-98 시즌엔 2부 리그 14위를 차지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팀 성적이 떨어지는 와중에, 구단은 뜬금없이 100년간 쓰던 역사적인 엠블럼을 버리고, 단순히 멋있어 보인다고 아무 의미없는 별 세개와 독수리로 엠블럼을 교체했다. 당시 팬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주변 여론은 이 사실을 비꼬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만수르 부임부터 엠블럼에 대한 얘기가 오가다가 교체 20년 뒤인 2016년에 전통의 엠블럼으로 회귀하게 된다.
구단 현지직원의 설명에 의하면 독수리는 맨체스터 인근의 땅을 처음 발견했던 로마를 상징한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2.2. 새 엠블럼 (2016~ )
2015-16 시즌, 예전 엠블럼으로 회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다가 영국 특허청의 유출로 인해 이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에 따르면, 현지 팬들과 30일 동안 엠블럼의 교체 여부와 엠블럼의 문양에 대해 협의했는데 이전의 독수리 엠블럼을 유지하자고 하는 입장은 1/3 (34%) 밖에 되지 않았으며 엠블럼을 교체하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차기 엠블럼에 들어갈, 맨시티와 맨체스터를 대표할 수 있는 색상과 상징물들을 투표했는데 색상은 하늘색 (94%) 과 흰색 (68%) 이 채택되었고, 상징물은 이전의 엠블럼에도 있었던 맨체스터의 배 (85%), 세 개의 강 (67%), 그리고 예전에 있었다가 사라진 붉은 장미 (60%) 가 채택되어 새 엠블럼에 조합되었다.
그 외 기타 팬들의 피드백과 기존 엠블럼 등을 포함하여 새 엠블럼을 만들었는데, 팀 이름의 배치를 위아래로 각각 Manchester, City로 나눈 것은 독수리 엠블럼에 있던 이니셜 (M.C.F.C)보다 더욱 맨시티를 대표하는 이름을 넣기 위해, 창단연도인 1894를 넣은 것[15][16] 은 맨시티의 긴 역사와 불변성을 강조하기 위해, 방패를 넣되 그 모양이 예전과는 다르게 바깥 원을 넘도록 만든 것은 방패 안의 문양을 돋보이게 하며 현대적인 감각을 더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3. 유니폼
맨체스터 시티 FC/유니폼 문서 참조.
4. 역사
4.1. 창단과 짧은 리즈시절 전까지
1880년, 잉글랜드 맨체스터의 고튼 서부에 위치한 세인트 마크스 교회 (St. Mark's Church)의 교인들이 다분히 인도적인 목적으로 훗날 맨체스터 시티로 알려질 축구 클럽을 창단했다. 당시 많은 실업자와 범죄자들이 맨체스터 동부, 특히 고튼에 만연해있었는데 현지인들을 위한 새로운 활동을 도입함으로써 이것을 개선하고 사회적 병폐를 줄이라는 아서 코넬 (Arthur Connell) 목사의 독려에 따라 교회 관리인인 윌리엄 비스토우 (William Beastow)와 토마스 굿비히어 (Thomas Goodbehere), 그리고 아서 코넬 목사의 딸인 안나 코넬 (Anna Connell)이 '''세인트 마크스 웨스트 고튼''' (St. Mark's West Gorton) 라는 교회 축구 팀을 창단한 것이다. 특히 안나 코넬은 '''19세기에 창단된 프로 축구 팀 가운데, 창단 멤버 중에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게다가 안나 코넬이 창단에 큰 기여를 했는데 원래는 크리켓이나 럭비팀을 만들려고 했는데 당시 지방 음주 노숙자라든지 여러 사회문제가 된 알콜중독자를 위한 스포츠로 두 종목은 맞지 않는다며[17] 축구팀을 만들자고 건의한 게 그녀였다고 한다.(2016년 9월호 베스트 일레븐 지 출처)
1884년, 세인트 마크스는 고튼의 또 다른 축구 클럽인 고튼 애슬레틱과 합병되지만 불과 한 시즌 뒤에 세인트 마크스는 고튼 AFC로, 고튼 애슬레틱은 웨스트 고튼 애슬레틱으로 분리되었다. 1887년에 연고지를 맨체스터 시 동부에 위치한 아드윅이란 동네로 옮겨 클럽 이름을 아드윅 AFC로 바꾸고, 홈 구장도 하이드 로드로 옮기게 된다. 1889년에는 하이드 로드 근처의 탄광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23명의 광부가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고, 아드윅 AFC와 뉴턴 히스(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가 지역 주민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자선 경기를 치르기도 하였다.
1892년 잉글랜드 축구 2부리그가 설립되었고 아드윅 AFC가 창립 멤버로 참가, 1894년에는 팀 이름을 '''맨체스터 시티 FC'''로 바꾸기도 하였으나 그 시절 리그는 매우 열악했고 지방의 중소 구단으로 자금 문제로 2부 리그로 내려갔다가 1898-99시즌에서야 드디어 1부 리그로 올라왔으나 다시 2시즌도 안 가 강등당했다. 그러다가 1시즌 만에 승격과 같이 다음 해인 1903-04시즌 볼턴 원더러스를 꺾고 FA컵 우승과 같이 리그 2위(우승은 더 웬즈데이가 2연속 우승)의 성적을 거두며 이름을 알리는가 했지만 오래가지 않아 또다시 강등과 승격을 거치며 중소 구단으로서 지내야 했다.(그 와중에 1923년 홈구장 하이드 로드가 불에 타버려서 메인 로드로 경기장을 옮기기도했다.)
1925-26시즌에는 감독 없이 FA컵 우승을 하기도 하고, 맨유 원정에서 6대1로 이기기도 했지만 강등당한다(...). 1928년에는 최고의 서포터즈를 가진 클럽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1934년 FA컵 우승, 라이벌인 맨유가 첫 리그 우승(1907-08시즌)을 거둔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인 1936-37시즌에서야 맨시티도 첫 리그 우승의 감격을 누린다. 하지만 37-38시즌, 리그 42경기에서 80골이나 넣는 공격력을 보유하고도 77실점이나 허용하는(...)수비진 탓에 강등당했다. 결국 맨시티는 지금까지 다음 시즌에 강등된 유일한 디펜딩 챔피언이자 실점보다 높은 득점(+3)을 기록하고도 강등된 유일한 팀으로 남는다. 그래서 1951년에 전쟁포로 독일인 골키퍼 버르트 트라우트만을 전격 영입하면서 타팀의 어그로와 수비를 강화하면서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승격과 강등을 거치면서 1955년에 FA컵 결승전에서 뉴캐슬에게 패해 우승컵을 내주지만, 1년 후 다시 결승에 진출해 우승한다. 1958년 '''뮌헨 참사'''에서 맨시티의 골키퍼였으며 기자로 활동하였던 프랭크 스위프트[18] 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4.2. 영광의 시대와 침체기
1965년에 조 머서가 감독으로, '빅 말(Big Mal)'이라는 닉네임을 막 달았던 말콤 앨리슨이 코치로 맨체스터 시티에 부임했다.
머서와 앨리슨의 부임 이후 맨시티는 큰 변혁을 맞았다. 조 머서 감독의 지휘 아래 말콤 앨리슨은 프랜시스 리, 콜린 벨, 마이크 서머비 삼총사를 중심으로 활력 넘치는 공격진을 만들었다. '''간단하지 않은 전술과 투지 넘치고 정교한 축구를 3년 연속 이어갔고 2부리그로 강등된 신세에서 다시 승격, 1967-68시즌 팀의 2번째이자 31년만의 리그 우승, 1968-69시즌 FA컵 우승, 그리고 1969-70시즌, 풋볼 리그 컵 우승과 함께 지금까지 맨시티의 유일한 유럽 클럽 대항전 우승인 UEFA 컵 위너스 컵까지, 이 모든 것은 단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1972년 구단 엠블럼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짧은 영광도 잠시, 1971년 피터 스웨일스 회장 취임 후 조 머서가 맨시티를 떠났고, 1973년 맨시티 성공의 주역이었던 앨리슨이 조 머서와의 불화로 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자 팀을 떠났다. 이후 1975-76시즌 풋볼 리그 컵우승을 하지만, 1981년 FA컵 준우승 이후로 거둔 우승은 고작해야 2부 리그 우승뿐이었다.
다만 맨시티의 20세기 후반 역사를 명맥유지도 불안했던 하위팀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맨시티는 당시에도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구장 중 하나를 가진 인기클럽으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 1980년대에도 꾸준히 관중순위 3-4위를 찍었으며, 프리미어리그 개편 전 1부리그 통산 테이블에서도 7위를 기록한다. 우승을 밥먹듯 하던 전세계구 명문은 아니었으나 리그에서 가장 입지가 탄탄한 터줏대감 클럽 중 하나로 90년대에 방만한 운영으로 강등되기 전까지는 꾸준히 중위권 정도의 성적은 냈었던 팀이다.
4.3. 프리미어 리그 이후, 탁신의 인수
1992-93 시즌부터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로 새롭게 개편하면서 맨유가 프리미어 리그 최다 우승을 거두며 세계적인 강호이자 인기팀이 될 때, 맨시티는 쇠락을 거듭했다. 그 사이 팀을 방만하게 운영해 온 피터 스웨일스는 1994년에 사임했고, 팀 레전드인 프랜시스 리가 회장으로 부임했다.
그럼에도 팀의 경영은 갈수록 더 악화되어 1995-96시즌 챔피언십 리그(2부), 더 나아가 1997-98 시즌 리그 1, 즉 3부리그까지 강등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리그 강호는 아니지만, 이것은 '''역대 유럽 클럽 국제 대회 우승팀 역사상 처음(UEFA 컵 위너스 컵 우승)으로 3부 리그 강등기록[19] 이란 불명예'''였다. 그나마 1시즌만인 1998-99 시즌 도중에 데이비드 번스타인 회장과 조 로일 감독이 각각 취임하여 1999년에 다시 2부리그로 승격했고[20] 1999-2000 시즌에 2부 리그 플레이오프에서 블랙번 로버스를 꺾고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였으나, 한 시즌만에 18위로 아쉽게 강등당했다.
그 사이 덴마크 같은 유럽축구 변방과 중국 같은 제3세계 등지에서 젊은 선수들을 영입해 전력 보강에 주력한 후, 2001-02 시즌에 새로 부임한 케빈 키건의 지휘 하에 리그 1위를 차지해 프리미어리그로 단숨에 올라왔다. 승격 첫 시즌인 2002-03 시즌에 상대팀에 따라 기복이 심하고 수비가 약해 54점 실점을 기록했으나, 9위로 마감하여 다크호스 노릇을 했다. 해당 시즌 우승팀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매치업에서 1승 1무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정든 메인 로드를 떠나 새 구장인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으로 둥지를 틀었다.
구장 이전 후 수비를 보강키 위해 아스날의 명수문장 데이비드 시먼을 영입하고, 풋볼 리그 디비전 1으로 막 강등당한 웨스트햄으로부터 미드필더 트레버 싱클레어를 사들여 전력 안정을 꾀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안 되어 리그 성적은 연이어 2004-05 시즌 빼고 16위, 15위, 14위를 각각 기록했고, 하위 팀으로서 강등을 겨우 모면하는 신세인 팀이었다. 2006-07 시즌에는 리그 컵에서 3부 리그 팀 체스터필드에게 털리고, 리그 내내 홈에서 10골만을 넣고, 리그 후반기 1월 이후엔 '''홈에서 단 한 골도 못 넣는''' 미친 대활약을 벌이면서 강등을 겨우 모면하고, 이 때 감독 스튜어트 피어스는 맨시티의 흑역사가 되어 쫓겨난다.[21]
그러다가 2007년에는 1년 전 쿠데타로 태국에서 쫓겨난 전 타이 총리 탁신 친나왓이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구단을 매입한다. 사실 맨시티 서포터들이나 영국 반응은 무덤덤했다. 탁신은 2004년에 리버풀 FC를 사려다가 실패했었고 이 와중에 자신이 리버풀 팬이란 언론 홍보를 하는 바람에 맨시티 팬들에게 '리버풀에서 거절하자 꿩 대신 닭이라고 맨시티를 샀다'며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그래도 돈 좀 들여서 과거 잉글랜드 국대를 지휘한 바 있는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과 프리미어 리그에서 통할 만한 몇몇 선수들을 영입했다.[22] 2007-08 시즌 맨시티는 초반 프리미어리그 3연승을 거두며 선두에 오르기도 했고, 맨유에 홈어웨이 모두 승리를 거두는 등[23] 좋은 성적을 내며 리그 2/3 정도 치른 시점까지 챔피언스리그를 사정권에 두었다. 첼시 원정 0:6 패배, 마지막 경기인 미들즈브러 원정에서 1:8 대패라는 옥의 티도 있었지만 리차드 던과 마이카 리차즈의 센터백 라인은 맨시티의 호성적에 큰 뒷받침이 되었다. 그리고 이적생인 엘라누와 마틴 페트로프도 적응기 없이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돌풍 팀들이 겪듯이 맨유 원정 승리 후 리그 12경기에서 3승2무7패에 그치며 리그 9위(영국 언론 포포투에서는 중위권 성적인 9위도 잘한 것이라고 평을 내렸다.)로 리그를 마쳤다. 9위로 리그를 마쳤지만 그 해 페어 플레이 팀으로 선정되며 1차 예선부터 UEFA 컵에 출전할 수 있는 진출권을 따내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탁신은 하위 팀을 중위권 성적까지 올려주고 25년 만에 UEFA 컵에 진출시킨 감독을 경질하고[24][25] , 호나우지뉴를 영입하겠다고 떠들면서 정작 팀의 주전 수비수 리처드 던의 주급을 올려주지 못해 잃을 뻔하던 일 등 한심하고 답이 없는 운용을 거듭하다가 태국에 있던 그의 자금이 법으로 막혀버리자 구단을 냅다 알 파힘을 통해 만수르에게 팔아 버렸다.[26]
이 당시의 맨체스터 시티에 대해 한국에서는 쑨지하이가 활약한 것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쑨지하이는 팀이 2부 소속이었던 2001-02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 이적했고, 다음 시즌 팀이 1부로 승격한 뒤 탁신이 구단주로 취임했던 2007-08 시즌 이전까지 계속 주전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탁신이 구단주가 된 이후 선수 보강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잃어 결국 2008년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또한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고의 악동 중 한 명인 조이 바튼이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일으키면서 한국 언론에서 종종 이름이 언급되기도 했고,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마르크 비비앙 푀의 소속팀으로 알려져 있었다.[27] 또 페테르 슈마이켈과 데이비드 시먼 등 특급 수문장들도 이곳에서 선수 말년을 보냈다.
4.4. 현재
만수르의 인수 이후 맨시티의 역사는 개별 문서를 참조 바람.
- 맨체스터 시티 FC/2008-09 시즌
- 맨체스터 시티 FC/2009-10 시즌
- 맨체스터 시티 FC/2010-11 시즌
- 맨체스터 시티 FC/2011-12 시즌
- 맨체스터 시티 FC/2012-13 시즌
- 맨체스터 시티 FC/2013-14 시즌
- 맨체스터 시티 FC/2014-15 시즌
- 맨체스터 시티 FC/2015-16 시즌
- 맨체스터 시티 FC/2016-17 시즌
- 맨체스터 시티 FC/2017-18 시즌
- 맨체스터 시티 FC/2018-19 시즌
- 맨체스터 시티 FC/2019-20 시즌
- 맨체스터 시티 FC/2020-21 시즌
5. 시즌별 일람
6. 역대 감독
7. 스쿼드
7.1. 1군 스쿼드
7.2. EDS 스쿼드
7.3. 주요 선수
※ 현재 맨시티 소속 선수는 두꺼운 글씨로 표기
- 빌리 메레디스
- 에릭 브룩
- 피터 도허티
- 토미 존슨
- 프랭크 스위프트
- 로이 클라크
- 로이 폴
- 베르트 트라우트만
- 콜린 벨
- 프랜시스 리
- 마이크 서머비
- 토니 북
- 마이크 도일[32]
- 데니스 튜어트
- 폴 파워
- 폴 레이크
- 게오르기 킨클라제
- 션 고터
- 폴 디코프
- 리처드 던
- 쑨지하이
- 숀 라이트 필립스[33]
- 조 하트
- 파블로 사발레타
- 뱅상 콤파니
- 야야 투레[34]
- 다비드 실바
- 세르히오 아구에로
- 케빈 더 브라위너
- 알렉산다르 콜라로브
- 가엘 클리시
- 가레스 배리
- 에딘 제코
- 페르난지뉴
8. 현재 스폰서
8.1. 글로벌 파트너 (Global Partners)
: 프리미어리그 2017년 11월 6일 아스날전에서 경기 직전 국민의례 행사 중 한 관객이 '신창중공업'이라는 한글이 적힌 점퍼를 입은 장면이 목격되었다. 이게 어찌나 화제가 되었는지 SNS에서 이 장면을 담은 사진이 대유행했고, 신창중공업 홈페이지에 방문객들이 몰려서 접속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결국 신창중공업 측에서 '홈페이지가 마비가 될 정도로 관심을 가져 줘서 감사를 드린다'라는 글을 올리기까지 했다. 회사 측의 설명에 따르면 해당 관객은 신창중공업 측과 협력하는 영국 기업의 직원이며 2년 전 회사를 방문했을 때 점퍼를 선물한 것이라고.
8.2. 지역 파트너 (Regional Partners)
9. 응원가
9.1. Blue Moon
9.2. Hey Jude
'''2015-16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VS 레알 마드리드 CF'''
맨시티는 비틀즈의 유명곡인 Hey Jude또한 응원가로 사용한다. 맨체스터의 팀이 리버풀 출신 밴드의 곡을 응원가로 쓰는 이유는 바로 맨시티가 두번째로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프리미어 리그의 전신)에서 우승했던 1968년 당시 이 노래가 나왔기 때문이다.[35]
10. e스포츠
본국에서 FIFA 시리즈 팀을 운영하고 한국과 중국에 FIFA 온라인 시리즈 2개 팀을 운영하고있다. 중국은 2018년 창단, 한국은 2019년에 창단했다.
11. 이야깃거리
11.1. 만수르가 맨시티를 택한 이유
사실 '''만수르는 왜 굳이 맨시티를 구매했는가'''라는 의문은 맨시티가 만수르에게 인수되면서 돈방석에 앉지 못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그리고 에버튼 FC 등의 팀의 팬들, 그리고 맨시티 팬들 사이에서도 여러 번 제기된 의문이다. 겉으로 보면 사실 당시의 맨시티나 선덜랜드나 풀럼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이고, 특히 대부분의 팬들이 빅클럽의 팬이고 중위권 이하의 팀과 리그에 관해선 관심이 없는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보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만수르가 맨시티를 선택한 이유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 두터운 팬층 - 맨시티는 성적에 비해서도 팬이 특히 많은 편인 팀이었다. 3부리그에서도 평균 관중이 3만 명에 육박했다는 건 맨시티 팬들이 구호로도 쓸 만큼 자랑스러워 하는 사실이고, 탁신 인수 전에도 맨시티 홈구장의 평균 관중은 사실 우승 이후의 평균 관중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이 조건은 사실 기본조건으로 몇 년 전 만수르가 아스날 FC를 사려다 실패한 이후로 만수르와 칼둔은 빅클럽보다는 잠재력을 지닌 팬층이 두터운 클럽으로 선회하게 되었다는 기정사실 수준의 설이 있다. 당시와 현재 거론되던 클럽인 뉴캐슬, 에버턴, 토트넘 등(이 셋이 가장 가까웠던 팀이다)이 모두 만족하는 조건이다. 아스톤 빌라 FC도 팬층이 두터운 편이나 당시 이미 러너에게 인수된 이후였다.
- 새로 증축된 큰+확장가능한 홈 구장 - 당시 맨시티는 2002년에 맨체스터가 영연방 경기대회를 개최하며 지은 4만 5천석 규모의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가지고 있었고, 낡은 구장을 가진 에버튼, 확장이나 이전이 어려워 지금도 허덕이고 있는 토트넘에 비해 맨시티가 확실한 강점으로 쓸 수 있었던 조건이다.[36] 구단주가 올드 트래포드를 뺨치는 8만 석 이상 경기장으로 확장될 예정이란 말도 있지만, 우선은 55,097석 규모로 증축했다. 올드 트래포드,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토트넘 핫스퍼 스타디움, 런던 스타디움 다음으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5번째 규모 경기장이다.
- 맨체스터의 규모, 발전 가능성 - 맨체스터는 잉글랜드 제2/3의 도시/광역권으로 버밍엄과 경쟁하는 관계이고 기반시설 또한 좋다. 또한, 경기장 근처에 개발할 만한 땅이 많은 조건이었고 맨체스터 동북쪽에 개발로 자본이 들어온다는 말 역시 많았다. 뉴캐슬과 비교하면 확실한 강점이고, 쇠퇴한 지 오래된 도시인 리버풀에 연고지를 둔 에버튼에 비해서도 강점으로 작용하며, 토트넘은 런던팀이지만 주변 환경이 좋단 평가는 못 받고, 또한 런던에 팀이 많기에...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존재 - 전 세계에 팬이 있는 맨유의 존재는 방해거리만이 아니라 강점으로 작용한다. 라이벌리를 이용한 기삿거리나 관심거리로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고, 맨유는 리그 내에 적이 가장 많은 팀이기도 하므로 맨시티의 지지층을 더 불러모을 수 있는 조건도 된다. 실제로 맨체스터라는 도시 이름이 맨유의 활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맨유의 성적이 떨어지자 맨시티로 갈아타겠다는 라이트 팬들의 존재가 많은 것을 보면, 라이벌리로서 맨유의 가치는 맨시티에게 큰 도움이 된다.[37]
- 하늘색의 사용 - 하늘색을 주색으로 사용하는 팀은 드물며,[38] 이는 쉽게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좋은 조건으로 작용한다. 에버튼의 파란색은 첼시 FC가, 토트넘의 흰색은 레알 마드리드 C.F.가, 뉴캐슬의 흰색/검은색은 유벤투스 FC가 이미 국제적인 이미지를 구축한 뒤였다.
- 팀 명 '시티' - 당시에도 맨시티는 전 세계에서 이름에 시티가 붙은 축구팀 중 가장 유명하고 명성이 높은 팀[39] 이었으며 당시든 지금이든 영국 내에서 관련된 내용에서 시티라 부르면 맨시티를 맨 처음 연상하게 된다. 이 시티라는 이름은 역시 브랜드를 만들기 쉬운 조건이었고, 이 조건상의 유리함은 이후 맨시티가 해외로 확장할 때 뉴욕 시티 FC, 멜버른 시티 FC의 사례에서 드러나게 된다.
- 전 소유자 - 전 소유자 탁신 친나왓은 위에도 서술되어 있듯 돈에 쫄려 빨리 팀을 팔아치워야 할 상황이었고, 이는 맨시티 매각가격 하락으로 나타났다. 에버튼과 뉴캐슬의 소유자인 켄라이트와 애슐리는 까다로운 사람으로 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며, 둘 다 만수르에게 값을 너무 높이 불렀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론 가격이 하락했다해도 탁신은 맨시티를 팔면서 2배가 넘는 이득을 보았지만...
11.2. 한국과의 관계
국내의 경우 예전에만 해도 라이벌 맨유에게 인지도나 팀 전력에서나 밀리고, 특히나 한국에서는 박지성의 존재로 인해 맨유의 인기가 넘사벽인지라 맨시티는 만수르 인수 이후 우승권으로 발돋움하고도 한국 팬덤이 EPL내 다른 빅 클럽에 비해 비교적 얕다고 평가받다. 그러나 현재는 꾸준한 뉴비 유입으로 팬층이 전에 비해 꽤 두터워진 편이며, 그 이유로 펩 과르디올라 부임 이후 리그 우승이나 우승경쟁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점도 있지만, 의외로 '''프리미어리그 모든 팀들 가운데서도 매우 왕성한 축에 속하는 구단의 對 한국 마케팅''' 역시 큰 역할을 했다. 심지어 박지성이 앰배서더로 재직중인 맨유나 손흥민이 주축으로 활동하는 토트넘과 비교해도 앞섰으면 앞섰지 결코 밀리지 않는 수준.[40] 직원 중 아예 한국 마케팅 담당자가 따로 있다고 한다.
한국인 선수와는 따로 인연이 없었으나, 2019년 이금민이 맨체스터 시티 위민에 입단하면서 맨시티 소속 첫 한국인 축구선수가 되었다. 다만 남자 축구 선수는 아직 없다.
- 매 해 1월만 되면 선수들이 나와서 한국어로 새해인사를 했다. 2014년에는 마이카 리차즈, 제임스 밀너, 스테반 요베티치가 새해 인사를 했고, 2017년까지 꾸준히 영상이 올라왔다.
- 새해 인사는 2018년부터는 따로 올라오지 않는 듯 하나, 대신 2016년부터 수능 응원 영상이 올라오고 있다. 2016년 첫 출연자는 니콜라스 오타멘디와 알레시 가르시아. 2017년에는 리로이 자네, 가브리에우 제주스가 출연했고[41] . 2018년에는 베르나르두 실바, 카일 워커, 벤자민 멘디가 출연했다. 2019년에는 리로이 자네와 함께 그 해 맨시티 위민에 입단한 이금민, 클럽 레전드이자 10월에 내한했던 숀 라이트 필립스가 등장했고, 2020년에는 에므리크 라포르트가 응원영상을 찍었다.
- 팬이나 언론이나 잘 모르는 사실인데, 1976년에 방한한 적이 있다. 6월에 입국해 동대문운동장, 구덕운동장,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세 경기를 치르고 갔는데,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1진 화랑과 두 경기, 2진 충무와 한 경기를 가졌고 2승 1패의 성적을 거두고 돌아갔다. 동대문에서 열린 충무와의 경기는 행정절차상 문제로 급하게 치러지다 보니 홍보가 미진해서 불과 4천여명의 관중들만이 입장했고, 경기를 관전한 주한 영국대사가 관중이 너무 적다며 디스하기도 했다.
- 이후 40년이 지난 2016년,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에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친선경기를 위해서 방한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북 현대 모터스 심판매수 사건 의 여파로 결국 취소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 바람.
- 2017년 10월, 추석에는 맨체스터 시티 한국 공식 홈페이지에서 맨체스터 시티에 관한 퀴즈 이벤트를 열었다. 당첨 상품은 퀴즈별로 각각 2017-18 시즌 홈, 어웨이, 써드 유니폼.
- 2017년 9월 15일 리버풀전, 맨체스터 시티에서 공식적으로 한국의 팬들을 위해 서울의 MUV홀에서 '서울: Our Kind of City' 이벤트를 열었다. 진행은 드러가쒀요! 쎄르히오 아구에로오!!! 로 유명한 김동완 해설위원이 맡았으며, 맨시티 팬으로 유명한 힙합 뮤지션 JOOSUC이 축하 공연을 겸해 참가한 가운데 500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대형 스크린으로 리버풀전을 관람하였다. 이날 시티는 5:0으로 리버풀을 격파하면서 각종 이벤트와 더불어 한국의 시티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 피파온라인4의 2주년 기념영상을 찍기도 했다.(...)
- 2019년 7월 24일에 킷치 SC와 맨체스터 시티의 친선경기에서 김동진이 은퇴경기를 치렀다. 그리고 김동진은 전반 15분경 교체 아웃되면서 리로이 자네, 케빈 데 브라이너 등의 맨시티 선수들과 악수와 포옹을 했고, 펩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자신의 이름(KIM)과 등번호(38)가 마킹된 맨시티 유니폼을 선물받았다. 김동진, 4만 관중 기립 박수와 펩 격려 받으며 은퇴식 영상
- 2020년 9월 17일, ‘Road Trip Challange’의 일환으로 한국의 지명들을 읽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해당 영상
11.3. 기타
- 만수르에게 인수되기 이전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명성에 비해 다소 묻혀있던 감도 있지만, 영국 현지에서는 예전부터 팬층이 두터운 팀이다. 특히 1934년 스토크 시티 FC와의 FA컵 경기에서의 관중 수가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홈 관중 수 최고 기록인 84,569명이었으며 3부 리그로 떨어졌을 때조차 리그 평균 관중 수가 8,000여명일 때 약 30,000명 정도 기록한 것은 맨시티 팬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점이다.
- 이 팀의 유명인 팬으로는 밴드 오아시스의 갤러거 형제가 가장 유명하며, 전설적인 록 밴드 더 스미스의 기타리스트 자니 마, 그 외에도 티머시 돌턴, 알란 릭맨, 마르코 피에르 화이트, 조이 디비전의 보컬인 이안 커티스[42] , 더 폴의 마크 E. 스미스, 영국의 유명 복싱 선수 리키 해튼[43] , 라이언에어의 사장 마이클 오리어리 등이 있다. 위의 유명 연예인들에 비해 경기장에 자주 오는 탤런트들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유명하지 않은 편.
- 오아시스의 맨시티 사랑은 축구계에서도 유명한 편. 노엘 갤러거는 만수르 인수 이전에는 언젠가 벌어둔 돈으로 자신이 구단주가 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고, 현재는 구단 사장이랑 같이 식사하는 사이(...)이다. 보컬이자 프런트맨인 그의 동생 리암 갤러거는 아예 라이브를 할 때 맨체스터 시티 티셔츠를 입고 한다. 참고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크기로 알려진 노엘은 방한했을때 인터뷰에서 에릭 남에게 "한국에서 많이 듣게 될 질문을 예습하겠다."면서 인터뷰에서 박지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을 아느냐"고 묻자 "저런 사람 모른다"라고 대답. 에릭 남이 웃으며 "정말 모르냐"라고 되풀이해서 물었지만, 갤러거는 "몰라 몰라"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고,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냈다.
- 팀에 이상할 정도로 대머리 또는 빡빡이 선수가 많다. 탈모에 걸린 레전드가 많은 라이벌 팀과 달리 이쪽은 아예 빡빡이가 팀 컬러냐는 소릴 들을 정도로 빡빡이가 많은 편. 리버풀의 예전 애칭인 빡빡풀의 뒤를 잇는 수준이다. 당장 감독인 펩 과르디올라, 18-19시즌 주장이었던 뱅상 콤파니, 19-20 시즌 주장인 다비드 실바, 골키퍼인 윌리 카바예로부터 시작해서 야야 투레, 라힘 스털링, 가브리에우 제주스, 엘리아킴 망갈라, 페르난지뉴, 파블로 사발레타, 페르난두 헤제스, 파비안 델프, 바카리 사냐, 애런 무이 등등 최소 맨시티에 있는 동안 한번 이상 빡빡이였다. 오죽하면 머리를 밀어버린 선수를 근본컷이라고 추켜세울 정도로 빡빡이가 많은데, 감독으로 펩 과르디올라가 부임한 이후에 이런 경향이 더욱 짙어졌으며 특히 17-18시즌 풍성한 머리카락을 지닌 다비드 실바가 머리를 밀어버린 이후에는 펩이 빡빡이를 강요한게 아니냐는 루머가 돌았을 정도였다. 큰 관계는 없겠지만, 실제로 맨시티의 장발이나 금발 선수는 상당히 드문 편이다.[44] 19-20 시즌에는 에데르송까지 안 그래도 길지는 않던 머리를 밀었다.
- 17/18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맨시티와 웨스트햄의 경기가 끝나고 SBS에서 하이라이트 영상을 기획하며 역대급 선곡을 했다. 맨시티가 이때 EPL에서 무패행진을 하고 있을 당시였는데 웨스트햄의 경기에서 전반 44분에 빡빡이 선수인 안젤로 오그본나가 골을 넣고 경기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후반 11분만에 니콜라스 오타멘디가 동점골을 넣고, 후반 37분 쯤에서 빡빡이 다비드 실바가 역전골을 넣어 맨시티가 승리한다. 결과적으로 맨시티의 빡빡이 선수진들의 하드캐리로 인하여 무패행진을 계속하게 된 스토리다.
- 19-20시즌에도 이런 기믹은 이어졌는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카일 워커가 머리를 밀고 나오더니 맹활약을 하기 시작했고, 새로 합류한 신성 로드리를 본 과르디올라는 “그는 귀고리도 하지 않고 문신 하나 없다. 헤어스타일 또한 짧고 단정하다. 축구를 위한 바람직한 자세가 되어있다”라고 극찬했다.
- 펩 과르디올라 감독으로 들어온 이후 대부분의 영입한 선수들이 첫시즌은 부진, 그 다음 시즌은 활약하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가브리에우 제주스와 리로이 자네, 베르나르두 실바가 영입 첫 시즌에는 경기에서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않다가 두 번째 시즌에는 주전 자리를 확보하거나, 많은 공격포인트를 올리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인지 2018-19 시즌 부진한 모습을 보였던 리야드 마레즈가 팬들의 기대를 받고 있는 상황인데 마레즈 역시 2번째 시즌부터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
- 공식적인 라이벌은 맨유 하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시티즌들이 느끼는 맨시티의 최대 라이벌은 리버풀 FC이다. 2013-14 시즌 리그 우승 경쟁을 통해 처음 대립구도가 생겼고 2015-16 시즌엔 리그컵에서도 라이벌리가 생기긴 했지만, 이 경쟁 구도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은 리버풀의 전력이 상승한 2016-17시즌부터다.
11.4. 2020년 UEFA의 FFP룰 위반 징계와 CAS의 징계 철회
- UEFA산하 구단 재정 조사 기관이 맨체스터 시티가 재정적 페어 플레이 룰[45] 을 위반하여 12-16 시즌 회계 장부를 조작했다고 판단하면서 맨시티에게 향후 2년 간 국제대회에 출전 금지 징계가 내려졌다. 물론 구단 측에서는 불합리한 판단이라 하며 항소를 진행하고 있기에[46]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만약 뒤집히지 않고 결과가 확정된다면 구단 입장에선 큰 타격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챔피언스 리그 진출이 2년이나 금지당할 경우 팀을 떠날 주축 선수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되었기에, 많은 구단들이 맨시티의 항소 결과에 주목하고 있었다.
- 항간에서는 CAS 항소 패배시 프리미어 리그 사무국의 자체 징계 절차에 따라 프리미어 리그 승점 삭감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한국에서는 4부 리그 강등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처음 제기한 영국 현지 언론부터가 '가능성이 극히 낮다' 라고 전제한 클릭 미끼에 불과하고,[47] 정론지에서 진지하게 보도된 적은 없는 이야기이다.
- 만약 맨체스터 시티가 최종적으로 유럽대항전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았다면 재정적 위기 역시 찾아왔을 것이다. 일단 킷 스폰서인 퓨마는 연간 1000억 원에 달하는 계약을 유지할 것임을 밝혔지만, 챔피언스 리그 중계권 수입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다는건 큰 타격이었다.
- 2020년 7월 13일에 발표된 CAS 판결 결과, 맨시티의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 혹은 공소시효[48] 만료를 이유로 챔피언스 리그 출전 정지 징계는 철회했고, UEFA의 조사에 협조해야한다는 FFP 56조에 대한 위반 혐의[49] 는 인정되어 벌금 €10M을 내는 걸로 감경되었다.
- 현지 시간으로 7월 28일 CAS의 전체 판결문이 공개되었다. 이 판결문에서 UEFA는 해킹된 이메일 말고 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독일 언론이 공개한 해킹된 이메일조차 악의적인 짜깁기와 조작이 있었음이 밝혀졌다.[50] 결국 판결은 맨시티 측에서 CAS에 제출한 원본 이메일을 두고 이뤄졌다. 2012-13. 2013-14, 2015-16 세 시즌에 대한 혐의 중에서 12-13은 UEFA 자체 징계 유효기간이 지나서 기각되었고, 13-14 시즌과 15-16 시즌의 경우 UEFA가 주장한 에티하드를 통한 우회 스폰서 혐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다.
- 무혐의로 결정되면서 맨체스터 시티 팬들은 축구를 계속 볼 수 있게 되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이것을 계기로 여름 이적시장에서 선수 보강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11.5.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감염
2020년 12월 25일, 카일 워커와 가브리엘 제수스, 그리고 구단 스태프 2명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에 구단 측에서는 감염자를 제외하고 경기를 강행하려 했지만 경기 직전 실시된 검사에서 추가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에버튼과의 경기가 무기한 연기됐다. 추가 확진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
12. 둘러보기
[1] 맨시티에 멤버쉽 가입을 한 전 세계의 공식적인 팬들을 일컬을 때는 시티(City)라는 브랜드를 살리고 싶어서인지 일반적으로 쓰는 스펠링인 Citizen이 아니라 독특하게 Cityzen이라고 쓴다. 다만 이건 구단에서 '''팬들에 대해 쓰는 브랜드 이름'''이다.[2] 현지 팬덤이 맨시티를 별칭으로 부를 때는 보통 시티즌스 같은 별칭들을 쓰지 않으며, 단순히 블루스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한번 시티팬이면 죽을 때까지 시티팬(One a Blue always a Blue), RIP Blue, Come on you Blues 이런 식으로 쓴다. 다만 첼시 FC와 같이 언급할 때는 시티를 스카이 블루스 혹은 단순히 시티라고 부르며 구별한다.[3] 소속 선수인 뱅자맹 망디가 팀이 17/18 시즌 전반기에 무패를 기록하며 극강일 때 유행시킨 별명으로 팬들은 물론 구단에서 공식적으로 쓰게 되었고 관련 상품까지 내놓을 정도로 어느덧 자리잡은 별칭[4] 2016년 새로운 엠블럼에는 창단년도를 1894년으로 인정했다.[5] 다만 최근에는 펩 과르디올라와 위르겐 클롭의 라이벌리로써 우승 경쟁을 하면서 리버풀과의 라이벌리가 꽤 격렬해졌다. 13-14시즌에는 그 유명한 훔바훔바로 인해 시티가 1위, 리버풀이 2위를 차지했다. 17-18시즌에는 리그 순위는 시티가 1위, 리버풀이 4위였으나 맨시티의 무패 우승을 저지한 팀이 리버풀이었다. 18-19시즌엔 스톤스의 역대급 클리어링으로 맞대결 승리를 가져간 시티가 끝끝내 1위를 지켜내며 98점 우승, 리버풀이 97점 준우승을 달성하는 역대급 우승 레이스가 펼쳐졌다. 19-20시즌에는 리버풀이 30년만의 우승 숙원을 푸는 와중에 102득점, 득실차 67이라는 압도적인 공격력을 자랑한 시티가 승점을 제때 확보하지 못하면서 준우승에 그치게 됐다.[6] 2008년까지 FC 바르셀로나의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당시 바르셀로나 회장이었던 산드로 로셀과 그 측근들이 벌인 라포르타 퇴임 운동 중 해임당했다.[7] 2003년 컨페더레이션스컵 준결승전 도중 엄청난 더위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한 카메룬의 미드필더 마르크 비비앙 푀의 등 번호 23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당시 푀는 올랭피크 리옹 소속으로 맨체스터 시티에 '''임대'''되어 있었지만 임대기간 동안 좋은 활약을 펼쳐서 '''완전이적이 유력'''한 상황이었다.[8] 잉글랜드 2부 리그 공동 '''최다 우승'''이다(...) 이 팀이 만수르의 인수 전까지 험난한 역사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팀은 레스터 시티 FC로 여기도 2부 리그 우승을 7번 기록했다.[9] 당시 기준 한화 약 980억[10] 옵션 제외 5500만 유로[11] 옵션 포함 최대 6000만 유로[12] 2위는 2019년 다닐루 (유벤투스), 3700만 £, 3위는 2005년 숀 라이트 필립스(첼시) 3100만 £, 4위는 2015년 알바로 네그레도(발렌시아)의 2700만 £ 이다.[13] 2021년 1월 16일 기준[14] 2분35초경부터 이어지는 노래는 'The Beat Goes On'이라는 비디 아이의 1집 'Different Gear, Still Speeding'의 수록곡이다.[15] 정확히는 아드윅 AFC가 현재의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름을 바꾼 연도이다.[16] 한국에서는 연도를 저렇게 두 자씩 끊어놓은 것이 부자연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영어권에서는 본래 연도를 읽을 때부터 두 자씩 끊어서 읽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17] 아닌게 아니라 이전에 있던 다른 교회 스포츠팀에서 크리켓에서 하라는 크리켓 배트로 상대방을 두들겨패고 패싸움이 벌어지거나 럭비도 공은 내팽개치고 사람을 들이박아 싸우기 일쑤였다고... [18] 맨시티 역대 키퍼 중 베르트 트라우트만 다음 두 번째로 뛰어났다고 꼽히는 레전드 키퍼이다.[19] 2004-05 시즌에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력을 가진 노팅엄 포레스트가 리그 1로 강등하기 전까지 유일한 기록[20] 과정이 굉장히 드라마틱했다. 3부리그 3위로 승격플레이오프를 치렀는데, 맨시티는 6위였던 위건 애슬레틱을 제압하고 결승에서 프레스턴 노스 엔드를 제압한 질링엄 FC와 상대해야 했다. 당시 질링엄 감독은 토니 퓰리스. 맨시티는 질링엄을 상대로 후반 36분과 후반 41분에 실점하며 승격은 물건너가는 듯 했는데, 추가시간에만 2골을 득점하며 승부를 극적으로 연장으로 끌고갔고, 결국 승부차기에서 3-1 승리를 거두며 2부리그 승격에 성공했다.[21] 참고로 이 당시 피어스는 잉글랜드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겸임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소속팀에 집중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셌다. 물론 맨시티에서 경질된 이후에도 청소년 대표팀 자리는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몇년간 키워온 선수들을 이끌고 2012 런던 올림픽에 나섰지만 8강에서 한국에게 져 탈락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22] 엘라누와 마틴 페트로프가 대표적이다. 그 외의 영입으로는 롤란도 비앙키, 발레리 보지노프, 베드란 콜루카, 지오반니, 겔손 페르난데스, 하비에르 가리도가 있다.[23] 2008년 2월 10일에 올드 트래포드에서 뮌헨 참사 50주년을 추모하는 기념식이 있었는데 맨시티가 맨유를 2:1로 꺾으며 맨유팬들을 더더욱 슬픔에 잠기게 만들었다.[24] 이 때 맨시티 팬들은 에릭손을 지킨다며 Save Our Sven, 줄여서 SOS 캠페인을 벌이지만 실패한다.[25] 에릭손 감독의 후임으로 마크 휴즈가 맨시티의 감독이 되었다. 맨유 레전드가 맨시티의 감독이 되어 논란이 있었다.[26] 탁신은 덕분에 2배 이상 이득을 보았다. 그리고 탁신의 후광을 입고 맨시티에 입단했던 태국 선수 3명은 2008년 10월에 전원 방출되었다.[27] 임대 신분으로 맨체스터 시티에 합류했었다.[28] 이 당시에는 UEFA 유로파리그가 아니라 UEFA컵 시절이어서 조별예선의 개념이 없었다.[29] 전 시즌이었던 2007~08 시즌에 '유럽 최고의 페어플레이 팀'으로 선정되어 출전했다.[30]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예선 3위 팀 중 상위권을 차지함에 따라 16강부터 참가하게 됨.[31] 여자축구 선수.[32] 토미 도일의 친할아버지[33] 라이트 필립스는 1999년 맨시티에서 프로 데뷔해 2005년까지 153경기 26골을 기록했고, 그가 첼시 FC로 이적하면서 남긴 31.5m 유로는 14년동안 다닐루가 판매되기 전 까지 깨지지 않았던 맨시티의 판매 클럽 레코드이다. 또한 2008년에 맨시티로 돌아와 2011년까지 뛰면서 64경기 9골을 기록했해 합계 9년동안 219경기 35골을 기록했으며, 그가 떠나면서 팀에게 남겨준 31.5m 유로의 이적료를 생각해 볼 때 팀의 레전드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결정적으로 구단이 팀 레전드들만 모아 그려놓은 위 그림에도 당당히 들어가있다.[34] 다만 이쪽은 경기 외적으로 보여주는 언플과 태도, 그리고 팀을 떠난 후 펩 과르디올라를 향한 비난 인터뷰 때문에 팬들의 지지도를 많이 잃었다. 실력으로는 레전드로 불리기에 한 치의 모자람도 없지만.[35] 출처[36] 결국 토트넘은 뒤늦게 새 구장인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으로 홈 구장을 옮긴다.[37] 물론, 에버튼과 토트넘의 라이벌인 리버풀과 아스날 역시 세계적인 명문 클럽이다. 뉴캐슬의 라이벌은 선덜랜드이지만 이것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선덜랜드도 1부리그에서 뛴 역사가 깊고 우승기록도 상당하며, 팬층도 두꺼워 홈구장이 5만석에 육박하는 인기클럽으로 관점에 따라 잉글랜드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기도 하는 가장 큰 클럽 중 하나이다. 2부리그 시절, 선덜랜드 팬인 서형욱이 2000년 초에 직접 2부리그 경기를 보러 갈때도, 2부리그로 강등당하던 시절에도 선덜랜드 서포터들은 2~3만명 수준 관중을 유지할 정도로 팬층이 두텁다.[38] 기껏해야 세리에A의 SS 라치오, SSC 나폴리 정도뿐이며, SSC 나폴리가 마라도나의 힘 덕에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기는 했으나, 세계적으로 하늘색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39] 또한 이름에 시티가 들어가는 팀으로서 그나마 가장 역대성적이 좋은 팀이다. 버밍엄 시티, 스토크 시티, 헐 시티 같은 다른 팀들은 죄다 하위리그 팀이거나 늘 강등권에 시달리고 있으며, 역대 우승 성적을 봐도 맨시티보다 떨어진다. 맨시티는 유로파 리그 전신인 위너스컵을 우승한 전적이 있으며, 시티라는 단어가 들어간 팀으로서 유일무이한 유러피언 클럽 대회 우승팀이다. 지금은 2부리그 팀인 버밍엄 시티가 1960~61시즌 인터시티 페어스컵(유로파 리그 전신) 준우승(우승은 AS 로마)을 한 게 있긴 하다. 이게 이름에 시티가 들어간 팀으로선 유이하게 맨시티랑 같이 유러피언 클럽 대회 결승 진출 기록. 더불어 리그에서도 맨시티가 그동안 시티라는 이름을 가진 유일한 리그 우승팀이었다가 2015-16시즌에 레스터 시티가 우승하면서 이 기록은 깨졌다.[40] 토트넘은 2021년이 되어서야 한국 공식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다.[41] 이 때 수능 응원인데 제수스가 나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42] 반대로 버나드 섬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다. 참고로, 오아시스의 1~2기 멤버였던 폴 본헤드 아서스도 맨유 팬. 그 덕분에 95년 당시 맨체스터 시티와 싸우는 다른 팀의 경기에서 갤러거 형제가 맨시티를 응원하고 있을 때 본헤드 혼자만 다른 팀을 응원했는데 맨시티가 우승을 거두자 갤러거 형제에게 물폭탄을 맞으며 놀림당하는 모습이 슈퍼소닉 다큐를 통해 얼핏 나왔다.[43] 유니폼 색깔도 맨시티를 상징하는 하늘색인 경우가 많다.[44] 타팀에선 그렇게 많이 보이는 스포츠 헤어컷이지만, 시티에선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그나마 최근 장발 스타일로 시티에서 뛴 선수라면 데미첼리스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단발로 잘랐다.[45] Financial Fair Play 축약형으로 FFP로 많이 알려져 있다.[46] 국제 스포츠재판소인 CAS에 제소하고, 이것조차 반려당할시 스위스연방법원에 제소할것임을 밝혔다.[47] 기사 예시. even though that scenario appears to be very unlikely(이 시나리오는 가능성이 전혀 없을지라도). 와 같은 문구들이 전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48] UEFA 규정상 FFP룰은 5년 이내에 처벌해야 한다. 이번 기소건이 2012년 - 2016년까지의 FFP위반에 대한 기소이기에, 2015년 이전의 혐의는 애초에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있었다.[49] 맨시티 구단은 조사 초기부터 악의적으로 날조된 불법 해킹 자료에는 협조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50] 예로 들면 2000년대 후반 FFP가 적용되기 이전에 보냈던 이메일이 FFP에 적용받는 시점으로 편집되어 있거나, 일부 문장을 일부러 생략하거나, 두 개의 연관되지 않는 이메일을 합치거나 등등.